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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의 대전제

2024 년 12 월 7 일

현대의 모든 것에서 , 루터가 앞장섰다고 ?

그렇다면 현대인의 말을 귀담아듣다가는 틀림없이 길을 잃을 것이다 .

무언의 대전제 (silent major) 란 도대체 무엇일까 ? 말수가 적은 군인 장교일까 ? 사실은 , 아니다 . 그것은 아마도 게오르그 겐스바인 (Georg Gänswein) 대주교가 집필한 책의 가장 흥미로운 인물의 이름을 말하는 방식일 것인즉 , 작년에 출판된 책 제목은 ‘ 믿는 자는 혼자가 아니다 . 베네딕토 16 세의 곁을 지킨 나의 삶 ’ 이다 . 겐스바인은 2003 년부터 2022 년 마지막 날 교황이 세상을 뜰 때까지 교황 베네딕토의 전속 비서로 발탁되었다 . 그동안 교황의 비서로서 겐스바인은 최고위에서 가톨릭교회의 사건에 긴밀히 연루됐으며 , 그의 책은 자연스럽게 이 많은 사건에 대해 흥미로운 세부 사항을 이야기한다 . 그러나 가톨릭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 가장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무언의 대전제 이다 .

논리학에서 , ‘ 무언의 대전제 ’ 란 완전하게 표현되는 삼단논법을 축약하는 한 방편으로서 , 삼단논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언급되지 않을 때 그런 이름을 붙인다 . 왜냐하면 무언의 대전제 의 내용은 아마도 너무나 명백해서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 삼단논법은 세 개의 연결된 명제 , 대전제와 소전제라는 두 개의 전제 , 그리고 함께 연결할 때 두 전제에서 추론될 수 있는 결론으로 ​​ 이루어지는 논증이다 . 대전제는 임신부 , 소전제는 산파 , 그리고 결론은 아기에 비유될 수 있다 . 따라서 대전제는 암묵적으로 결론을 포함하지만 , 소전제는 대전제에 포함됨을 보여줌으로써 그 결론을 명확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 .

그래서 모든 삼단논법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 대전제 : “ 모든 사람은 합리적이다 ,” 소전제 : “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 결론 : “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합리적이다 .” 무언의 대전제 를 가진 삼단논법은 이렇게 축약될 수 있다 . 즉 , “ 소크라테스는 인간이어서 , 합리적이지 않을 수 없다 ,” 거나 더 짧게 “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니까 합리적이다 .”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항상 삼단논법을 사용하거나 , 다른 두 가지에서 하나를 추론하지만 , 삼단논법을 생략하지 않고 다 전개하는 경우는 드물다 . 대전제나 소전제를 빼먹는 경우가 많지만 , 대전제를 빼먹는 경우가 더 잦고 , 그러면 무언의 대전제 라는 경우가 생긴다 . 두 가지 사례가 더 있다 . “ 축구는 스포츠이므로 , 시간 낭비다 .” 그리고 “ 가톨릭 전통은 현대인에게 닿지 않는다 . 그것은 시간 낭비다 .” 여기서 무언의 대전제 는 “ 모든 스포츠는 시간 낭비다 ,” 와 “ 현대인에게 닿지 않는 종교는 쓸모없다 ,” 는 것이다 .

이런 식으로 겐스바인은 그의 책에서 바티칸 내부의 삶 그리고 특히 책을 읽고 쓸 수 있는 조용한 곳에서 칩거하기를 선호한 까닭에 결코 교황이 되기를 바라지 않은 원래 학구파 , 뛰어나나 겸손한 사람으로서 교황 라칭거 자체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의적인 초상화를 그렸다 . 사실 그는 66 권을 썼고 , 책들은 겐스바인이 말하듯 , 그의 일상생활처럼 의심할 여지 없이 현명하고 전통적인 많은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이것이 당시에 많은 전통주의자가 그에게 희망과 신뢰를 품었던 이유이다 . 하지만 궁극적으로 교황은 그들을 실망시켰다 . 왜 ? 무언의 대전제 때문에 .

실제로 라칭거는 모든 모더니스트처럼 현대인에게 다가가는 것에 매달렸다 . 그러므로 그에게는 자신이 알고 있던 가톨릭 전통의 변함없는 진리는 항상 최소한 현대인에게 맞는 방식으로 새롭게 표현 돼야 했다 . 그렇지만 유명한 독일 ‘ 철학자 ’ 인 요한 피히테 (Johann Fichte, 1762-1814) 는 말하기를 , 루터가 ‘ 최초의 모더니스트 ’ 라고 했다 .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가 가톨릭교회 , 사실상 천주께 배역하는 루터의 반란에 얼마나 젖어 있는지 알려면 자크 마리탱 (Jacques Maritain) 의 ‘3 인의 종교 개혁가 ’ 를 읽어보라 . 그렇다면 모더니스트는 조제프 라칭거의 글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완전한 이단으로 가는 길목에서 , 모호함에 의지하지 않은 채 , 천주를 부정하는 현대인에게 천주를 공경하는 진리를 어떻게 적응시킬까 ?

또 대주교 , 추기경 또는 교황 라칭거의 최고 통찰력 뒤에는 어떤 무게가 있을 수 있을까 ? 그가 무언의 대전제 “ 가톨릭교는 현대인에게 닿아야 한다 ,” 를 믿는다면 , 그는 기껏해야 가톨릭 진리를 절반만 믿을 수 있을 뿐이다 . 하지만 가톨릭 진리는 전부 다이거나 아무것도 아님이다 . 만약 내가 이단을 단 하나라도 믿는다면 , 나는 가톨릭 신덕을 잃은 상태이다 . 르페브르 대주교가 1990 년에 로마가 신덕을 잃었다고 말했을 때 과장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 하지만 겐스바인은 배교한 로마와 로마인들이 마치 아주 정상이라는 듯이 묘사한다 . 그 자신은 무언의 대전제 의 희생자일 수 있을 뿐이다 .

원문 링크 : https://stmarcelinitiative.org/category/eleison-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