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만약 로마가 성비오10세회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준다면, 왜 우리 SSPX가 여전히 거절해야만 하는가?
만약 SSPX의 실용적인 요구들을 실용적 합의가 충족시킨다면, 그것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천주교신자들이 여전히 분명하게 존재한다. 왜 안되는데? 왜냐하면 SSPX는 그전에는 위험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2차 바티칸에 의해서 위험해진, 진리의 천주교 신앙을 위해서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지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여기에서 왜 새교회 권위는 SSPX가 그것을 거절해야 하는 만큼 실용적인 합의를 추구할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이유는 새교회는 주관주의자이기 때문이고, 어떤 작은 실용적 합의라도 주관주의는 진리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새 공의회 신앙에 따르면, 신앙의 교리들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고 주관적인 필요들에 봉사하는 상징들이다(Pascendi, 11-13, 21). 예를 들어 만약 내 심리적 불안이 천주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확신에 의해서 잠잠해졌다면, 그러면 천주님의 육신을 입으심은 나를 위한 진리가 되는 것이다, 오직 “진리” 단어의 느낌 안에서 말이다. 그래서 만약 전통주의자들이 오래된 종교에 대한 그들의 필요가 있다면, 그러면 그것은 그들을 위한 옳은 것이고, 누군가는 어떻게 그들이 그들의 진리에 붙어 있는지에 대해 존경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공정하게 보면 그들은 반드시 우리 로마인들이 공의회 진리를 가지도록 해야 하고, 만약 그들이 그 양보를 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들은 참을 수 없이 이기적이고 묵과할 수 없는 자들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불화를 우리 싸랑의 교회(Church of luv) 안에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신-현대주의자 로마는 SSPX가 오직 “그것의” 진리들의 우주성과 의무에 대한 그의 원초적인 요구들을 암암리에 포기하기는 것 조차에 의한 어떤 실용적 합의에도 기뻐할 것이다. 반면에 SSPX는 백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잘 말해준다고 20 백년의 “그것의” 신앙에 대한 부인인 어떤 실용적인 합의에도 행복해질 수 없다. 그것은 전혀 “그것의” 신앙이 아니다. 주관주의자들과 합의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객관에 대한 주장을 중지해야한다. 객관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나는 그들이 그들의 주관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주관주의자들이 제안하는 어떤 조건들도 받아들이 수 없다.
이 로마인들은 그런 것을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그들의 새 종교에 대한 십자군적인 주장에 대한 다른 증거가 프랑스에서 그들의 최근 “선한 목자회에 대한 교회법적 방문에 대한 결론 노트”의 형태로 다가 왔다. 여러분들도 기억하다시피 이 회는 공의회 후에 설립된 로마의 권위 아래 전통 가톨리시즘의 실행을 가능하게 했던 여러 기관들 중에 하나였다. 로마는 그 불쌍한 물고기가 바늘에 잘 걸려 있게 하기 위해 몇 년을 더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 “노트”는 2차 바티칸과 1992년판 새교회의 교리가 반드시 그 회의 공부들에 삽입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회는 “계속성에서의 갱신의 해석”에 대한 주장을 해야하며, 트리덴틴 미사를 그것의 “독보적인” 미사의 경문으로 다루기를 중단해야 한다. 그 회는 “일치의 정신”을 가지고 공식 교구로 들어가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그 전통 회는 만약 그것은 새교회에 속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전통적으로 되는 것을 중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밖에 무엇을 그 회는 바랐단 말인가? 전통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새교회의 권위 아래서 다시 튀어 나와야 한다. 그것에 대한 어떤 기회가 거기 있는가? 그들은 공의회 괴물에 의해 삼켜지기를 바랬었다. 지금 그것은 그들을 소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도대체 왜 그것이 SSPX와 다를 것이란 말인가? 로마의 유혹은 이번판에는 SSPX에 의해서 거절될 수 있지만, 착각은 하지 말자: 그 주관주의자들은 다시 또다시 또다시 돌아올 것이다.그들의 범죄적인 난센스를 꾸짖으며 서있는 것을 구성하는 객관적 진리와 객관적 신앙을 제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키리에 엘레이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