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하게 거행되는 가톨릭 성사를 위해, 거행자는 “교회가 하는 것을 하는” 지향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EC 124). 그 지향은 그에게 교회가 무엇이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정확한 생각을 요구한다 (EC 125). 이제 2차 바티칸이 그 생각을 오염시킴으로써 그 지향을 갉아 먹는다는 것과, 그런 식으로 일찌기 전 교회 역사상 볼 수 없었던 끔찍한 일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남았다.
이것은 2차 바티칸은 적어도 1400년대의 르네상스로 돌아가는 반 가톨릭 인간주의로의 회귀의 공식화이거나, 교회 내의 공식적 항복이다. 수세기 후, 진짜 천주님을 흠숭하는 교회인들은 현대세계의 인간 숭배로 대체됨에 대해 강직하게 저항했으나, 500년 넘도록 이교인들만 증가할 뿐, 교회인들은 결국 1960년대에 포기하고 말았고, 2차 바티칸으로 그들은 현대세계를 이끄는 대신 그것을 따라가기를 착수했다. 교회내에 언제나 세상에 대한 추종자들이 있어왔으나, 전에는 그 추종이 우주적 교회 안에서 공식화 된 적이 없었다!
어쨌거나, 공의회 교부들은 오랜 신앙을 모두 버리지 않거나 버릴 수 없었으니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그것을 여전히 믿음이요,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외양을 지키기는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왜 공의회 문서들이 모호함으로 묘사되며, 천주님의 자리 안의 천주님의 신앙을 천주님의 자리 안의 인간의 신앙과 혼합시키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이 모호함은 보수적 가톨릭 신자가 2차 바티칸은 오랜 신앙을 제외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위해 공의회문서의 글자에 호소할 수 있으며, 진보적 가톨릭 신자는 공의회는 새로운 신앙을 진작시키고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같은 글자 안에서의 그 정신에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리고 여기서는 두 보수자 진보자 말이 맞다! 이와같이 오랜 신앙은 여전히 2차 바티칸에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핸들카 위에 있어, 그 이후로 계속 미끄러져 굴러가며 사라지는 중이다.
유사한 모호함은 겉으로는 천주님의 신앙에 경의를 표하지만 속으로는 인간의 신앙을 주입하는 공의회의 정신 안에서 다시 쓰여진 성사 경문에 폐해를 끼쳤다. 오랜 신앙은 여전히 그 안에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성사경문(유효함에 대해서는 필수적인 단어들)이 대개 자동적으로 무효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이 경문을 둘러싼 모든 양식은 새로운 신앙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래서, 인간을 천주님의 자리에 놓으려는 부드러운 그러나 첨예한 현대세계의 압력이 주어졌고, 모든 성사 거행자들은 압력 하에서는 쉽게 쉬운 길을 좋아하게 되는 우리 불쌍한 오랜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주어지니, 이 새 경문은 종국에는 거행자의 성사적 지향과 바로 이어 성사적 유효성까지 갉아 먹는다.
천주교 신자는, 그 새 경문을 피하면서, 신앙의 균형을 지킨다. 이런 경문은 자동적으로 무효하다고 말하지도 말고, 그것들이 유효할 수 있으므로, 그것들이 무해하다고 말하지도 말라. 만약 그것들이 유효하더라도, 그것들은 신앙을 갉아 먹는다. 그것들을 사용하는 성직자들에 관해서는 만약 그들이 그 경문을 사용한다면 그들이 신앙을 잃었다고 말하지도 말고, 만약 그들이 그것들을 사용한다면 그들이 무해하다고 말하지도 말라. 이런 거행자들은 신앙은 여전히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만약 그들이 당신의 신앙을 갉아먹도록 고안된 경문을 사용한다면 당신에게 해를 미칠 위험을 그들은 모른 채 하는 것이다. 오랜 경문을 찾아보라, 그리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성직자들도. 그렇게 함으로 당신은 천주님의 명예와, 그분의 진정한 신앙과, 그 종교 없이 길을 잃어버린 많은 영혼들을 구할 것이다.
키리에 엘레이손.